병원 데스크 업무를 덜어보려다 서류 더미만 쌓였다

병원 데스크 업무를 덜어보려다 서류 더미만 쌓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귀찮음을 해결하고 싶었다

병원을 운영하는 지인에게 밥을 얻어먹으면서 들었던 이야기가 시작이었다. 접수대에 쌓이는 차트와 카카오톡 알림톡으로 예약을 확인하느라 진이 빠진다는 거다. 그때 마침 채널코퍼레이션이나 세일즈포스 같은 회사들이 AI 기반의 CRM 솔루션을 내놓고 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났다. 요즘 다들 마케팅 AI니 뭐니 하면서 자동화 도구를 쓴다길래, 비용을 좀 들이더라도 사람을 한 명 더 쓰는 것보다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컨설팅 업체들을 기웃거리다가 일단은 ‘Clinic OS’ 같은 거창한 것까지는 아니어도, 적당한 고객관리 프로그램부터 도입해보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처음에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상담 기록을 엑셀이 아니라 시스템에 넣으면 알아서 예전 상담 내용이 뜨고, 미결정 환자한테 사후 연락이 자동으로 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낯선 솔루션과의 첫 대면과 설정의 늪

결국 이름 좀 알려진 CRM 도입 상담을 받았는데, 이게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 데모 버전을 며칠 써보는데, 환자 접수부터 동의서 수집까지 전부 다 연결하려면 기존에 쓰던 병원 프로그램이랑 연동이 되어야 했다. 가격도 처음 들었던 것보다 매달 나가는 비용이 꽤 되었다. 한 달에 대략 30~50만 원 정도는 잡아야 하더라. 그런데 막상 설치하고 나니 예전 환자 데이터 옮기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수기로 작성했던 차트들을 디지털화해서 입력하는 데만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실장님은 그냥 예전처럼 수첩에 적는 게 빠르겠다며 눈치를 줬고, 나도 그 말에 사실 반쯤 동의했다. 도구를 쓰기 위해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이 투입되는 이 역설적인 상황이 정말 짜증스러웠다.

카카오톡 알림톡 설정하다 퇴근 시간을 놓쳤다

가장 기대했던 건 카카오톡 알림톡 자동 발송이었다. 예약 시간에 맞춰 메시지를 보내고, 노쇼 방지를 위해 안내를 하겠다는 거였는데, 이 알림톡 문구 하나하나 수정하는 게 일이었다. 예시 문구는 너무 딱딱해서 병원 분위기랑 안 맞고, 그렇다고 너무 친근하게 쓰자니 신뢰도가 떨어질 것 같았다. 결국 반나절 동안 문구 수정만 하다가 퇴근 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시스템이 알아서 해줄 거라 믿었는데, 시스템을 길들이기 위해 내가 더 많은 규칙을 정해야 했다. 처음엔 마케팅 AI가 병원 접수랑 상담을 다 해줄 줄 알았지, 내가 이렇게까지 붙잡고 씨름해야 할 줄은 몰랐다. 지금은 좀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알림톡이 환자에게 제대로 갔는지 확인하기 위해 수시로 관리자 페이지를 들여다본다. 과연 이게 효율적인 건지 가끔 의문이 든다.

여전히 남은 미결정 환자 관리의 숙제

원래 목적이었던 미결정 환자 사후 관리는 생각보다 진척이 더디다. 프로그램이 ‘사후 관리 대상’이라며 목록을 띄워주긴 하는데, 결국 그 환자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건 사람의 몫이다. AI가 대신 말을 걸어줄 수는 없으니까. 물론 예전보다는 누락되는 환자가 적어진 건 사실이다. 그 점은 확실히 편리하다. 하지만 도입 전에는 ‘AI가 알아서 다 해주겠지’라는 막연한 환상이 있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냥 ‘데이터를 잘 기록하고 확인하게 해주는 거대한 엑셀장부’를 쓰는 기분이다. 가격도 매달 고정비로 나가니 솔직히 본전 생각도 난다. 다른 원장님들은 이걸 어떻게들 잘 쓰는 건지 모르겠다.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채로 남겨진 오늘

이제는 CRM이 없으면 오히려 불안한 수준까지는 왔다. 기록이 시스템에 다 있으니까. 그래도 여전히 가끔씩 에러가 나거나 연동이 꼬일 때면 다시 종이 차트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든다. 디지털 도구가 업무를 도와주는 건 맞는데,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묘한 피로감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늘 퇴근길에도 환자 한 명의 상담 내용을 시스템에 옮겨 적으면서 이게 최선일까 고민했다. 아마 내일도 똑같은 고민을 하겠지만, 당장 뾰족한 수가 없으니 그냥 써야겠지. 편리함과 귀찮음 사이에서 어디쯤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딱히 결론도 없이 매일 조금씩 개선해가는 게 이게 이 업의 현실인가 싶기도 하다.

댓글 1
  • 엑셀 장부라는 표현이 딱 맞네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요.